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7년 전쟁 (문단 편집) === 다시 중부 유럽 전역 (1762 ~ 1763) === ||[[파일:attachment/7년 전쟁/b0042023_4955d2aea4eec.jpg|width=350]]||[[파일:attachment/7년 전쟁/b0042023_49586a586511c.jpg|width=350]]|| ||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 ☆[[표트르 3세]] || [[1762년]] 초, 대프로이센 동맹의 한 축이던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죽고, 그 뒤를 [[표트르 3세]]가 이었는데, 이 표트르 3세는 열렬한 '''프리드리히 대왕 숭배자'''였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절부터 천재적인 용병술을 보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당시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유럽 전역에서 인기가 드높았는데, 표트르 3세 역시 왕자 시절부터 프리드리히 대왕의 무용담에 감복하여 그의 열렬한 빠돌이가 되었다. 표트르 3세는 즉위하자마자, 프리드리히 2세에게 '''영토를 포함, 전쟁 이전 상태로의 회귀'''를 아무 조건없이 제안했고, 품 안의 독약을 언제 먹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프리드리히 2세는 냉큼 화친을 받아들였다. 표트르 3세는 그걸로 부족해서, 대프로이센 전쟁의 동맹국이던 스웨덴까지 설득시켜 스웨덴도 전쟁에서 이탈하게 만들었다.[* 당시 [[스웨덴 국왕]] [[아돌프 프레드리크]]와 표트르 3세는 [[덴마크]] [[글뤽스부르크 왕조|올렌보르 왕조]]의 분가인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 사람으로 가까운 인척관계였다. 심지어 아돌프 프레드리크의 왕비 [[루이제 울리케]]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여동생이었다. 그리고 표트르 3세는 러시아의 병력 중 일부를 프리드리히 대왕 휘하로 넣어주기도 했다.] 이 믿기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을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Mirakel des Hauses Brandenburg)"'''이라고 부른다. ||[[파일:attachment/7년 전쟁/b0042023_494b72cd88856.jpg|width=350]]||[[파일:attachment/7년 전쟁/b0042023_494b73dc3f00a.jpg|width=350]]|| || ☆[[마담 드 퐁파두르]] || ☆[[마리아 테레지아]] || 이런 대반전으로 인해 프랑스의 [[루이 15세]]나 [[마담 드 퐁파두르]], 그리고 무엇보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원래 대프로이센 동맹은 마담 드 퐁파두르, 마리아 테레지아, 옐리자베타 여제 때문에 '''3부인 동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사실 마리아 테레지아도 정식지위는 황후인지라...그래서 옐리자베타 여제의 죽음이 전황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뒤엎을 정도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 일이 현실로 닥친 것이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7년에 걸친 전쟁으로 더 이상 국력이 남아나질 않는 상태였으며,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 전쟁의 패배로 전쟁을 지속할 동기가 사라진 상태였는데, 유일하게 건재한 동맹국 러시아가 이탈하니 그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준이 아니었다. 동맹 이탈도 이탈이지만, 이런 식의 말도 안되는 협상 내용을 그것도 러시아가 먼저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표트르 3세가 단순히 빠심에 의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러시아는 근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며 표트르 3세는 이 근대화의 모델을 프로이센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미 몇 세기 전부터 러시아에 북부 독일 출신의 상인이나 기술자들이 많이 들어와 살아서, [[러시아어]]로 '[[독일인]]'을 뜻하는 немец의 어원이 '외국인'일 정도였다. 즉 촌동네인 러시아까지 들어와 살 외국인은 독일인 정도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는 [[종교의 자유]]와 러시아의 [[봉건제도]]에 귀속되지 않을 [[특권]]을 약속하면서 이들을 붙잡아두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표트르 3세의 외할아버지인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를 [[근대화]]시키기 위해 많은 북부 독일 출신의 지식인과 장교를 초빙하여 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러시아 토착 귀족들은 궁정의 요직을 차지한 독일인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옐리자베타 여제가 독일인을 증오해서 정권을 잡자마자 러시아 궁정에서 독일인 관료들을 쓸어내 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표트르 3세가 러시아 토착 귀족을 억누르고 유럽식 근대화를 재개하기 위해서는 프로이센과의 관계를 재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3국동맹으로 프로이센을 쥐어패는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프랑스는 이미 식민지 전쟁에 눈을 돌려 유럽 전장에서는 거의 이탈한 상황이었으며, 오스트리아도 사실상 마른 수건을 쥐어짜내며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공세 종말점에 도달했을뿐만 아니라 재정적 압박을 받고 있던 러시아가 프로이센을 멸망시키긴 어려웠고, 러시아의 전쟁 목표 또한 프로이센의 멸망은 아니었다. 이 전쟁이 끝난 뒤에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의 뒷마당이나 다름없는 [[동유럽]]과 [[흑해]] 연안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었으며, 이 때를 대비해서 프로이센을 살려두어 오스트리아의 힘을 분산시키는 것이 더 나았다. 실제로 표트르 3세는 6개월만에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서 폐위 되었는데, 그 이후로도 러시아는 재참전하지 않았다.[* 표트르 3세의 폐위가 1762년 7월이고 7년 전쟁은 그 이후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게 연달아 패배하면서 1763년 2월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으로 끝났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 바로 예카테리아 2세가 프로이센과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오스트리아를 견제하면서 동유럽과 흑해 연안에서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즉, 동맹에서 빠진게 마냥 이유없는 선택은 아니었다는 것.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전쟁 배상금이나 영토 일부의 할양처럼 러시아에게 유리한 조건을 내걸었다면 모르겠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이 부분에서 러시아가 가시적으로 얻은 성과가 없었다. 러시아가 7년 전쟁에 가담한 이유는 [[발트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동프로이센을 점령한 뒤 프로이센과 강화하여 동프로이센을 얻어낸 후 이를 폴란드의 [[쿠를란트-젬갈렌]]과 교환할 속셈이었다. 차라리 원래 속셈대로 아직까지 물러나지 않은 동프로이센을 내놓으라 하면 좋았을 것이다. 당시 프로이센-러시아 전선은 러시아가 유리하긴 했지만 보급선이 너무 길어져 사실상 공세종말점에 가까워졌고, 프로이센군은 이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반전을 꾀하고 있었다고는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약체화된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군을 견제하는 동시에 러시아군을 깨부수고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 하거나 매우 어려웠지 않았나 싶다. 괜히 이 일이 '''기적'''이라 불리는건 아닐 것이다. 즉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고는 하나, 그 것으로 러시아 국내의 여론을 납득시키기엔 여러 모로 부족했다. 무엇보다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가 패전국 상대로 되려 패전국에 이득이 되는 미친 협상을 해버렸다는 것 자체'''가 국내 뿐 아니라 국외, 나아가 현대 외교사를 비롯한 역사계에서 보면 정말 어이없고 유례를 찾기 힘든 사례이다. 이렇게 표트르 3세의 삽질은 프로이센에겐 큰 회생 기회가 되어버렸고 이 때문에 표트르 3세를 몰아낸 예카테리나 2세조차 그렇게 타격을 입었음에도 6개월만에 좀비같이 살아나 오스트리아에게 대반격을 성공해버리는 것을 보고 승기를 다시 잡기 어렵다 판단했는지 표트르 3세의 명령으로 프로이센 지원을 하게된 러시아군을 물리는 것으로 전쟁을 그칠수 밖에 없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의 마지막 국력 한 방울까지 쥐어짜내며 최후의 공세를 시도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기 시작했으며, 작센 전역에서는 1762년 10월 프리드리히 2세의 동생인 [[프리드리히 하인리히|하인리히]] 왕자가 [[프라이베르크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였다. 이보다 앞선 1762년 6월에는 하노버의 [[빌헴스타흘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영국-하노버 연합군을 상대로 졸전 끝에 패배하였다. 프랑스는 안그래도 신대륙에서의 계속된 패배와 영국 해군의 항구봉쇄로 인해 전쟁 수행 의지가 떨어지고 있었는데, 두 전투의 패전 소식을 듣자 영국-프로이센 연합국과 강화하고 전쟁에서 완전히 발을 뺐다. 한편 [[1762년]] 뒤늦게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서 전쟁이 터졌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침공하였으며, 영국의 지원을 받은 포르투갈은 게릴라전을 통해 스페인을 격퇴하였다. 전쟁 마지막해인 [[1763년]]에 접어들면서, 유럽에서 오직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만이 전투를 지속하고 있었다.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을 슐레지엔에서 거의 몰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작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모두 국력을 완전히 소진하여 상대에게 결정적 한방을 날릴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프로이센이 점령한 작센 영토와 오스트리아가 끝까지 사수하고 있던 슐레지엔의 영역을 교환하기로 합의하면서 1763년 2월에 길었던 7년 전쟁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